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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시장의 기억 - 이태호(한국의 자본시장은 어떻게 돌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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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데 책 한 권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하면, 무엇을 가져가실지 생각해보셨나요? 베스트셀러를 가져가서 출판하면 떼부자가 될 수 있지 않겠냐고요? '시장의 기억' 이 책을 가져간다면 부자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겁니다. 한국의 자본시장은 어떻게 돌아갔는지 해방 이후부터 금융위기까지 차근차근 되짚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인데요. 단순히 주식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제도 전반적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장의 기억

우리나라 주식과 투자가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는 꼭 추천해드릴 만한 책입니다. 여러 장면 중 인상 깊게 남았던 장면들을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1. 투기의 신 - 반복창

일제강점기 시절,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인 오사카도지마 취인소를 뛰어넘는 거래소가 바로 한국에 있었습니다.
인천미두취인소였습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1896년 일본이 미곡의 품질과 가격의 표준화 명목으로 세웠는데요. 무려 10배 레버리지가 가능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쌀값의 변동이 커졌는데요. 이런 변동성에 투자한 부자들이 많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이에 따라 투기꾼들도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탄생한 투기의 신이 바로 반복창인데요. 반복창은 12살의 나이에, 미두 시장에서 주름잡던 일본인의 하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8살에 400원을 밑천으로 독립하여 1920년 1년에만 30만 원을 벌었다고 알려지는데요. 당시 조선인 순사의 월 30원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부를 벌었네요. 1920년 그의 나이 고작 20살이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1921년 4월, 김후동과 조선 호텔에서 초호화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결혼식 단 하루에만 그 당시 돈으로 3만 원을 썼다고 하네요. 김후동은 여고보를 졸업한 신여성 미의 여신으로 추앙받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부러울 것 없던 반복창은 그러나 1922년부터 예측하던 미두 시세가 자꾸 빗나가 손해를 보게 됩니다. 계속된 실패로 불과 2년 만에 전재산을 탕진하고, 세 아이가 있었지만 아내와도 이혼하게 되고 서른 살의 나이로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었고 한 판에 몇 전이나 거는 '절치기꾼'으로 몰락하게 되었고 40세까지 비참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죠. 그리고 미두 시장도 반복창이 죽고 20일 뒤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반복창의 몰락에는 일본의 영향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투기의 DNA가 있는 건지 2002년, 2003년 선물 옵션 거래량이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몰락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김후동과 그녀의 동생 김화동에 대한 세기의 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포스팅했으니 관심 있으시면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2021.08.19 - [일상 흥밋거리] - 미인 수난시대 - 김후동과 김화동, 원동 재킷과 원동 큰 재킷

2. 1972년 8월 3일 사채동결 조치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8월 3일 0시, 박정희 정부는 기습적으로 기업의 사채를 월 이자 1.35%(연 16.2%)로 조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전년도 물가상승률이 14%였으니, 이자의 부담이 확 줄게 되었죠. 기업 사채는 한국 경제가 10% 안팎의 고속성장을 구가해오던 1960년대 깊숙이 퍼져있었습니다. 대기업도 50%에 달하는 이자를 감수해야 했었습니다. 이러한 기업 사채 규모는 조사 결과 무려 3456억에 달해있었죠. 당시 협의통화(M1)의 80%에 달하는 금액이었는데, 이는 예상치의 2배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사채동결 조치를 통한 사금융의 양성화는 1972년 실질 GDP 성장률 7.2%에서 1973년 14.9%로 급반등 시킨 원동력 중 하나로 꼽히며 경제에 숨통을 주는 정책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전체 건수의 90%가 금액으로도 30%가 넘는 300만 원 이하의 소액 사채도 함께 동결되어, 개별 가계들에 대한 피해도 커서 대기업을 살리고 가계에 부담을 주었다는 오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3. 뱅크런 32조, 2011년 저축은행 사태

저축 은행 사태

2011년 2월, 부산 대전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소식에 뱅크런(대량 인출 사태)이 벌어졌고. 2010년 말 76조 원에 달하던 저축은행 예금은 2012년까지 32조 원이 빠져나갔습니다. 이 기간 10만 명이 넘는 피해자가 발생했고 예금보험공사는 27조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뜨겁던 2000년 중반 부동산 관련 대출인 PF라 불리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이 호황을 나타냈는데요. 2006년 저축은행은 7000억 원대의 순이익을 만끽하였습니다. 2007년 PF 관련 대출은 12조 원으로 폭증했는데요. 이러한 영원할 것 같았던 부동산 호황기가 끝나자 저축은행에는 부실화된 대출만이 자리했습니다. 2011년 관련 자금 7조 원을 조사한 결과 반이상의 자금이 부실 대출로 드러났죠. 이에 따라 20곳에 가까운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고 5천만 원 이상 예금은 5000억, 후순위 채권 투자손실 8500억 원에 달했습니다. 조사 결과 부산저축은행그룹은 6조 원대의 불법대출 혐의가 적발되었고 다른 은행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국민들에게 예금자 보호 5천만 원 한도라는 제도는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히게 되었죠.

 

4. 양적완화가 키운 비트코인 열풍

책은 암호화폐로 끝을 맺는데요. 금융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양적완화는 통화의 불신을 가져왔고 이는 암호화폐의 탄생의 결과를 가져왔는데요. 초기엔 조세회피처로 유명한 키프로스라는 작은 섬나라의 부도로 이를 몰래 옮기기 위한 검은돈으로 수요가 급증했고 블록체인이란 기술이 각광받으며,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 뒤 묻지 마 투자로 이어졌는데요. 폭풍이 지나가고 암호화폐의 가치는 하락했고 다시 '코로나19가 세계적 대융행에 들어간 2020년 다시 무제한 돈 풀기에 들어갔다.'로 양적완화로 돈이 풀리고 있는 것으로 마치 암호화폐의 재상승을 예견하듯 책은 끝이 납니다.

 

시장의 기억의 단편적인 몇 사례들을 가져와봤는데요. 책의 내용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재밌지는 않으신가요? 재밌으셨던 분들은 꼭 책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또한 책의 인포그래픽 또한 좋은 내용들이 많아서 참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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