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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흥미거리

미인 수난시대 - 김후동과 김화동, 원동 재킷과 원동 큰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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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두 시장의 슈퍼개미 반복동의 이야기를 찾아보다 보니, 반복동의 아내 김후동과 김후동의 동생 김화동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한 야사였는데요. 일제 강점기 한국의 미인들의 이야기는 어땠는지 궁금하진 않으시나요?

 

반복창과 결혼했던 김후동은 당대의 미인으로 굉장히 유명했는데요. 이런 기사까지도 있었습니다.


미인이라 하면 얼굴만 고와서 되는 것이 아니요 태도만 어여뻐서 되는 것도 아니다. 얼굴과 태도가 다 맞아야 비로소 미인 소리를 듣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완벽한 미인이 드물어서 얼굴이 예쁘면 대개는 미인이라 한다. 그러나 처녀시절 김후동 씨야 말로 얼굴과 태도와 수족까지 어디 한 군데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발뒤꿈치까지 끌리는 그의 검고 윤기 있는 머리는 그의 아름다움을 돋우었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22일 자)


얼마나 이쁘면 기사에 이렇게 미모에 대한 칭찬을 하는 걸까요. 그런데 이보다 더 유명한 게 동생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김후동이 미스코리아 서울대회 진이었다면, 동생 김화동은 미스코리아 전국대회 진이었던 것이죠. 오죽하면 동생은 원동 재킷으로 언니는 원동 큰 재킷으로 불렸을까요.

 

1. 김화동 '원동 재킷'

김화동
김화동 & 박석규

연애를 상징하는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연녹색 치마에 붉은 해당화 빛 단을 대어 입고, 좀 갸름하고도 고와 보이는 어여쁜 얼굴을 화려하게 단장하고, 옆으로 넘긴 트레머리에 일부러 두세 줄 머리털을 이마 앞으로 넘겨놓고, 굽 높은 구두를 발끝으로 디디고, 가는 허리를 맵시 있게 가누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양은 목석의 심장이 아닌 이상 누구이든지 그 요염한 아리따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점점 그가 아리땁다는 소문과 늘 속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닌다 하는 풍설이 점점 널리 퍼진 결과 원동에 사는 재킷 입고 다니는 어여쁜 여학생이라 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거의 다 짐작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일보’ 1921년 1월 23일 자)

 

위의 기사의 내용은 김화동에 대한 기사였는데요. 그녀가 입은 '원동 재킷'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원동 재킷'의 명성은 그녀가 밖으로 돌아다닐수록 커졌는데요. 그녀를 쫓아다니던 사람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녀의 눈엔 차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기다리는 백마 속 왕자님이 있었거든요.

 

김화동은 무엇보다도 돈 있는 남자! 자기를 도쿄 유학생으로 만들어줄 남자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랑 구걸 편지’ 속에서도 천 마디의 사랑한다는 사연보다 돈이 많으니 일본에 같이 가자는 한마디의 사연을 기다리고 고대했으나, 그를 사랑한다는 청년 중에는 그러한 팔자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조선일보’ 1921년 1월 25일 자)

 

그러던 중 재산가 박석규가 참한 신붓감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진을 찍어 일본으로 보내니 얼마 후 박석규가 마음에 드니 일본으로 건너오라며 100원짜리 지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박석규는 김화동이 일본으로 건너오자 결혼도 하지 않고 단지 욕정의 대상으로만 대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집에 돌아와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결국 유산을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일보에 무려 12회 연재되면서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 김후동 '원동 큰 재킷'

김후동
김후동과 자녀

김화동의 유산 후 불과 몇 달 뒤, 김후동의 초호화 결혼식이 조선호텔에서 열렸습니다. 서울 시내 3분의 1의 자동차가 모이고 열차까지 대절하는 당시 돈으로 3만 원, 현재 돈으론 계산에 따라 다르지만 10억 이상의 결혼식을 진행했는데요. 이게 말이 되는 건지, 결혼으로 운을 다 써버렸던 건지 반복창은 결혼하자마자 조금씩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도장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반복창은 무일푼으로 전락했습니다. 김후동은 자신이 반복창의 재산에 눈멀어 결혼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낳아주어야 했고, 결혼 생활 재미가 어떠냐는 질문에는 애써 행복한 척 연기해야만 했습니다.

벌써 김후동 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요, 며칠 안 돼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들으니 그의 남편 반복창 씨가 미두에 많이 실패하여 부부끼리 여러 가지 근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란 세상에 돌고 도는 것이니 잃은 들 얻은들 무엇이 그리 신통하리오. 오직 신통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맺힌 세 개의 사랑의 열매인가 하노라.
“어머니 된 감상 말이에요?” 하고 그는 그 애교 있는 얼굴에 웃음을 듬뿍 띠면서
“아이 낳기 전에는 남편이 제일인 것 같더니 아이 낳은 후부터는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처녀 시절에는 자식이 무엇이 그리 중할까 그랬더니 막상 낳고 보니깐 그렇지 않아요.”하고 사랑스러운 아들딸을 양쪽에 앉히고 이리 보고 저리보고 앉았다. 그의 얼굴 가운데는 어머니로서의 만족한 빛이 가득했다.
(‘반복창 씨 부인 김후동 씨’, ‘동아일보’ 1926년 1월 22일 자)

이 인터뷰 이후 김후동은 결국 1년이 지나지 않아 이혼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최고의 미녀로 칭송받았던 자매의 몰락은 너무나 안타까운데요. 두 자매 모두 당시 고등보통학교를 나왔을 정도로 생활이 부족하지 않았고 수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는데 선택을 잘못하고 말았습니다. 주식과는 관련된 내용은 아닌데 어떠셨나요. 다른 내용을 조사하다가 흥미로울 만한 내용이 있으면 또 가져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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